윌리엄 브래드포드의 일기
1620년 겨울, 북아메리카 해안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가장 급한 것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눈앞에 닥친 문제는 훨씬 단순했습니다. 오늘 밤을 살아남을 수 있느냐였습니다.
집은 제대로 지어지지 않았고, 먹을 것은 부족했습니다. 긴 대서양 항해로 사람들의 몸은 이미 약해져 있었고 추위와 질병까지 겹쳤습니다. 하루에도 사람이 두세 명씩 죽어나가는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장례를 치를 여유조차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미국 건국사의 출발점처럼 이야기하는 플리머스 식민지(Plymouth Colony)의 첫 장면은 사실 이런 모습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훗날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 바로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였습니다. 그가 남긴 《Of Plimoth Plantation》, 흔히 한국어로 《플리머스 정착기》 또는 브래드포드의 일기라고 불리는 기록을 읽어보면 미국 초기 식민지의 역사는 성공담이라기보다 처절한 생존 기록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일기란 무엇인가
먼저 한 가지부터 정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Of Plimoth Plantation》은 흔히 ‘브래드포드의 일기’라고 소개되지만 매일 그날의 일을 적은 일반적인 일기나 메이플라워호의 항해일지는 아닙니다.
브래드포드는 플리머스에 도착한 지 약 10년이 지난 1630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이 기록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이후 식민지의 역사를 회고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기록은 초기 이주 과정부터 1640년대까지 이어지며 마지막 메모는 1650년 무렵까지 남아 있습니다. 매사추세츠주립도서관 역시 이 책을 메이플라워의 실시간 항해일지가 아니라 브래드포드가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훗날 정리한 회고적 역사 기록으로 설명합니다. 메사추세츠 주 정부
따라서 이 글에서는 편의상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일기’라고 부르지만, 정확히 말하면 플리머스 식민지를 이끈 지도자가 남긴 1차 사료이자 식민지 연대기에 가깝습니다.
| 구분 | 내용 |
|---|---|
| 저자 | 윌리엄 브래드포드 |
| 원제 | Of Plimoth Plantation |
| 성격 | 회고적 식민지 역사 기록·1차 사료 |
| 집필 시작 | 약 1630년 |
| 주요 기록 범위 | 메이플라워 이주와 플리머스 식민지 초기 역사 |
| 핵심 주제 | 생존, 종교, 자치, 농업, 원주민 관계, 식민지 운영 |
브래드포드는 1621년부터 여러 차례 플리머스 식민지 총독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록은 단순한 여행자가 바라본 미국이 아니라 식민지 운영 책임자가 내부에서 바라본 생존 보고서라는 점에서 가치가 큽니다. 메사추세츠 주 정부
메이플라워호가 도착했지만 새로운 삶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 이주민들은 흔히 ‘필그림(Pilgrims)’이라고 불립니다.
이들 가운데 핵심 집단은 영국 국교회에서 분리된 종교적 분리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국을 떠나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생활하다가 자신들의 신앙 공동체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북아메리카로 이동했습니다.
하지만 메이플라워호가 도착했다고 해서 식민지가 바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항해 자체가 이미 상당한 체력 소모를 일으켰고, 북미에 도착한 시기도 늦가을이었습니다. 식량을 확보할 농경지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집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처음 계획했던 정착권의 범위를 벗어난 지역에 도착하면서 정치적 문제까지 발생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주민들은 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을 작성하고 자신들을 하나의 ‘civil body politic’, 즉 정치 공동체로 조직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최소한의 질서와 통치 체계를 먼저 만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메사추세츠 주 정부
오늘날 메이플라워 서약은 미국의 자치 전통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지만, 이것을 현대 민주주의 헌법과 완전히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지나치게 단순해집니다.
당시 사람들의 목적은 거대한 민주주의 국가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행정적 공백 속에서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통치 질서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첫겨울, 100명이 넘던 사람들이 50명도 남지 않았다
《플리머스 정착기》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1620~1621년 첫겨울입니다.
브래드포드는 특히 1월과 2월에 상황이 심각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문제는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추위가 심했고 제대로 된 집이 부족했습니다. 긴 항해 이후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았습니다. 브래드포드는 괴혈병(scurvy)을 비롯한 여러 질병이 퍼졌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어떤 날에는 하루에 두세 명씩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는 100명이 조금 넘던 사람들 가운데 결국 50명도 채 남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상황이 가장 나빴을 때 건강한 상태로 병자들을 돌볼 수 있었던 사람이 불과 6~7명 정도였다는 대목도 나옵니다. Project Gutenberg
이 부분을 읽으면 플리머스 정착을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결국 식민지는 살아남았고 도시가 만들어졌으며 이후 뉴잉글랜드 지역의 영국계 정착지는 빠르게 확대됩니다.
하지만 1621년 초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런 미래가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플리머스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시작’이 아니라 절반 가까운 동료가 죽어가는 작은 생존 캠프였습니다.
생존을 더 어렵게 만든 것은 추위보다 공급망이었다
식민지 생존에서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가 바로 공급망(supply chain)입니다.
오늘날에는 부족한 물건이 있으면 다른 지역에서 가져오면 됩니다. 하지만 17세기 북대서양 식민지에서는 영국에서 보급선이 한 번 늦어지는 것만으로도 생존이 위협받았습니다.
곡식은 심는다고 바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자를 확보하고, 계절에 맞춰 파종하고, 수개월 동안 작물을 관리하고, 수확한 뒤 다시 겨울 식량을 비축해야 합니다.
초기 이주민들은 북아메리카의 토양과 기후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유럽에서 알고 있던 농업 기술을 그대로 적용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브래드포드의 기록에는 식량이 부족해 한 사람에게 하루 빵 4분의 1파운드 정도를 배급했던 시기가 나타납니다. 그는 개인이 식량을 직접 보관했다면 너무 빨리 소비해 이후 굶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총독이 매일 일정량을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했습니다. Project Gutenberg
이것은 초기 식민지가 얼마나 취약한 경제 시스템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돈이 있다고 식량을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식량 자체가 존재해야 했습니다.
플리머스는 빈 땅이 아니었다
초기 미국사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함께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필그림들이 도착한 지역은 원래 사람이 살지 않던 ‘빈 땅’이 아니었습니다.
플리머스 지역은 원래 파투셋(Patuxet)이라 불리던 왐파노아그(Wampanoag) 계열 공동체의 생활권이었습니다.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이전부터 왐파노아그 사람들은 현재의 매사추세츠 남동부와 로드아일랜드 일대에 여러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616~1618년 무렵 유럽인과의 접촉 이후 발생한 대규모 전염병으로 지역 인구가 크게 감소했습니다. Plimoth Patuxet Museums
필그림들이 정착한 것은 바로 이런 역사적 상황 이후였습니다.
따라서 플리머스 정착을 단순히
유럽 사람들이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을 발견해 식민지를 만들었다
라고 설명하는 것은 실제 역사와 거리가 있습니다.
이미 그곳에는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고, 전염병과 유럽 세력의 진출로 기존 사회가 크게 흔들린 상황에서 새로운 영국 식민지가 들어온 것입니다.
스콴토 없이는 플리머스 생존을 설명하기 어렵다
플리머스 생존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 티스콴텀(Tisquantum),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름으로 스콴토(Squanto)입니다.
그의 인생부터 극적입니다.
스콴토는 파투셋 출신이었지만 1614년 영국 선장 토머스 헌트에게 납치되어 다른 원주민들과 함께 유럽으로 끌려갔습니다.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영어를 배우고 북아메리카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고향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전염병으로 파투셋 공동체가 크게 파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Plimoth Patuxet Museums
이런 배경 때문에 스콴토는 영국 이주민과 원주민 사회를 연결할 수 있는 매우 특수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브래드포드는 스콴토가 이주민들에게 옥수수를 심는 방법을 알려주고, 어디에서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지 알려주며,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할 때 안내자와 통역자 역할을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Project Gutenberg
흔히 ‘스콴토가 필그림에게 옥수수 농사를 가르쳐주었다’는 한 문장으로 끝나지만 실제 의미는 훨씬 큽니다.
그는 단순한 농업 선생이 아니었습니다.
언어 통역자이면서 지역 지식 제공자였고, 교역과 외교에서도 중요한 중개자였습니다.
17세기 새로운 환경에 떨어진 유럽 이주민에게 이런 로컬 지식(local ecological knowledge)은 오늘날의 지도, 농업 매뉴얼, 통역 서비스, 식량 정보가 모두 합쳐진 것과 비슷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마사소이트와의 관계도 생존 전략이었다
1621년 플리머스 이주민들은 왐파노아그 지도자 마사소이트(Massasoit) 측과 협정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브래드포드는 이 관계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Project Gutenberg
이 역시 단순히 ‘원주민들이 착해서 이주민을 도왔다’는 식으로 설명하면 부족합니다.
왐파노아그 사회 역시 정치적 계산이 있었습니다.
전염병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주변 집단들과의 세력 관계를 고려해야 했습니다. 새로운 영국인 집단과의 동맹이 정치적·군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지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대로 플리머스 식민지도 원주민 공동체와 전면 충돌을 벌이면서 살아남을 만큼 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초기 관계는 단순한 우정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맞물린 외교적 공존에 가까웠습니다.
코리의 중간생각
《플리머스 정착기》를 읽다 보면 저는 ‘개척 정신’보다 먼저 취약함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후대에서 보면 그들은 미국 역사의 출발점에 서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내년 봄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유 역시 개인의 용기 하나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원주민의 지역 지식, 식량, 외교, 노동 분담, 자치 조직이 동시에 작동했습니다.
그래서 플리머스 역사는 영웅 한두 명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가까스로 맞아떨어진 생존의 역사로 보는 편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공동 경작에서 가족별 경작으로 바뀐 이유
플리머스 식민지 역사에서 경제적으로 흥미로운 장면도 있습니다.
초기에는 식민지의 계약 구조와 공동 생산 방식 때문에 생산물과 노동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 의욕과 생산 효율을 둘러싼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브래드포드는 이러한 공동 운영 방식에 상당히 비판적인 평가를 남겼습니다. 결국 1623년 무렵 각 가족이 자신의 농지를 맡아 경작하도록 생산 체계가 변경됩니다. 브래드포드는 개인과 가족이 자신들의 생산량을 직접 책임지게 되면서 더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고 평가했습니다. Project Gutenberg
다만 이 대목을 흔히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농업은 실패했고 자본주의를 도입하자 플리머스가 살아났다.”
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17세기 플리머스의 생산 계약은 현대의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체제와 그대로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작황에는 날씨와 노동력, 종자, 농업 기술, 원주민에게서 얻은 지식, 외부 보급과 교역까지 여러 요소가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만 브래드포드의 기록을 통해 소유권과 노동 인센티브가 식민지 경제 운영에서 실제 논쟁거리였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줄팁|《플리머스 정착기》를 읽을 때는 ‘누가 영웅인가’보다 ‘어떤 시스템이 사람들을 살아남게 했는가’를 따라가면 훨씬 재미있습니다.
실제 기록으로 보는 플리머스 생존의 세 장면
1. 병자를 돌볼 사람조차 부족했던 첫겨울
첫겨울의 핵심 문제는 단순히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환자가 급증하면서 공동체의 노동력 자체가 무너졌다는 것이 더 심각했습니다.
사람이 아프면 집을 짓지 못합니다.
집을 짓지 못하면 더 많은 사람이 추위에 노출됩니다.
농사를 준비하지 못하고 식량을 조달하지 못하면 영양 상태가 악화됩니다.
영양 상태가 악화되면 다시 질병에 취약해집니다.
즉, 플리머스 식민지는 질병 → 노동력 감소 → 주거·식량 부족 → 추가 질병이라는 생존 악순환에 빠져 있었습니다.
2. 옥수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생존 기술이었다
스콴토에게 배운 옥수수 재배는 새로운 작물 하나를 배운 정도의 사건이 아닙니다.
유럽계 이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북미 동부 환경에서 실제로 잘 자라는 작물이었습니다.
옥수수는 이미 원주민 사회에서 오랫동안 재배되며 지역 환경에 맞춘 농업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브래드포드 역시 스콴토가 옥수수 재배와 관리 방법에서 큰 도움을 줬다고 기록합니다. Project Gutenberg
따라서 플리머스의 생존을 ‘유럽 문명이 북미 황무지를 개척했다’는 관점만으로 이해하면 절반밖에 보지 못합니다.
실제로는 원주민이 축적한 환경 지식이 유럽 이주민의 생존 기술로 이전되는 과정이 존재했습니다.
3. 배급과 농업 생산이 식민지 정치보다 중요했다
메이플라워 서약과 총독 선출은 역사적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일반 정착민에게 매일 더 직접적인 문제는 식량이었습니다.
오늘 200g의 빵을 먹을지, 내일 먹을 종자를 남길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치 이론은 생존 문제보다 뒤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브래드포드의 기록에는 오늘날 역사책에서는 짧게 지나가는 배급량, 옥수수, 농경, 교역, 보급선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바로 이런 부분 때문에 《Of Plimoth Plantation》이 재미있습니다.
거대한 미국사의 시작이 의외로 아주 현실적인 문제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브래드포드 기록은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어도 될까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플리머스 정착기》는 뛰어난 1차 사료이지만 완전히 중립적인 기록은 아닙니다.
브래드포드는 식민지의 지도자였습니다.
또한 깊은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기록은 기본적으로 영국계 정착민의 시선입니다.
왐파노아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과 영국인의 진출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는 브래드포드의 기록만으로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대 역사 연구에서는 브래드포드의 기록뿐 아니라 에드워드 윈슬로(Edward Winslow)의 기록, 《Mourt’s Relation》, 고고학 자료, 그리고 왐파노아그의 역사와 구전 전통을 함께 살펴봅니다.
미국 의회도서관에는 브래드포드와 윈슬로가 관련된 《Mourt’s Relation》을 비롯해 플리머스 초기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여러 1차 자료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Library of Congress
이렇게 여러 기록을 함께 볼 때 비로소 플리머스의 역사가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왜 《플리머스 정착기》가 미국사에서 중요한가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기록이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유명한 인물이 썼기 때문이 아닙니다.
미국 식민지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내부에서 장기간 기록한 자료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그 안에는 메이플라워 항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 공동체의 갈등이 있고, 식량 부족이 있습니다.
농업 문제가 있고 무역이 있습니다.
총독 선출과 공동체 규칙이 있으며 원주민과의 외교, 충돌, 협력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감정이 보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믿음,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 그리고 공동체 내부의 현실적인 갈등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플리머스 정착기》는 단순한 미국 역사책이 아니라 17세기 식민 사회가 어떻게 운영되고 살아남았는지 보여주는 생존 기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공 신화 뒤에 가려진 사람들을 함께 봐야 한다
플리머스의 역사는 이후 미국 역사에서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메이플라워, 필그림, 추수감사절, 메이플라워 서약 같은 이야기는 오랫동안 미국의 국가 정체성과 연결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현대적으로 읽을 때는 조금 더 넓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국 이주민들이 살아남은 것은 사실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정착한 땅에는 이미 왐파노아그를 비롯한 원주민 공동체가 존재했습니다.
유럽에서 유입된 질병은 원주민 사회에 엄청난 인구 손실을 가져왔고 이후 유럽계 식민지가 확대되면서 토지와 정치 권력을 둘러싼 갈등도 커졌습니다.
초기 협력 관계가 영원히 지속된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플리머스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주민의 생존과 원주민 사회의 변화라는 두 흐름을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브래드포드의 기록은 더 흥미로워집니다.
그가 말한 것뿐 아니라 그가 기록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까지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플리머스의 생존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뉴잉글랜드에는 더 많은 영국계 이주민과 청교도 공동체가 들어오면서 정착지는 빠르게 확대되었고, 종교는 사회 질서와 정치 운영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앙 공동체의 결속이 강해질수록 다른 종교적 해석이나 생활방식을 둘러싼 갈등도 커졌습니다.
종교적 이상, 공동체 규율, 원주민과의 관계, 식민지 확장이 서로 얽히면서 뉴잉글랜드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한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이 흐름을 함께 보면 「청교도 사회의 빛과 그림자|메이플라워 그 이후 뉴잉글랜드의 확장과 종교 갈등」 에서 플리머스 이후 청교도 사회가 어떻게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긴장과 충돌이 나타났는지를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코리의 생각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플리머스 정착기》를 읽으면 미국사의 시작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불안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메이플라워호에서 내린 순간 미국이라는 거대한 미래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첫겨울에 절반 가까운 사람이 죽었고, 식량은 부족했으며, 새로운 환경에서 농사를 짓는 방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플리머스 사람들이 살아남은 데에는 강한 공동체 의식과 자치 조직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스콴토를 비롯한 원주민의 지식과 교류, 농업 생산의 변화, 식량 배급, 보급과 교역 같은 현실적인 요소가 함께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플리머스 정착기》의 가장 큰 가치는 ‘위대한 미국이 시작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사회가 얼마나 위태로운 조건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한 역사는 결과만 보면 필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브래드포드가 남긴 기록 속으로 들어가 보면 당시 사람들에게 미래는 전혀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점이 4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기록을 읽어볼 만한 이유입니다.
참고자료
- William Bradford, Of Plimoth Plantation
- State Library of Massachusetts, Bradford’s Manuscript “Of Plimoth Plantation”
- Library of Congress, Bradford’s History “Of Plimoth Plantation”
- William Bradford & Edward Winslow, Mourt’s Relation
- Plimoth Patuxet Museums
- U.S. National Park Service
- Library of Congress, The Journal of the Pilgrims at Plymouth
FAQ
Q1. 《플리머스 정착기》는 윌리엄 브래드포드가 매일 쓴 일기인가요?
아닙니다. 일반적인 의미의 일일 일기나 메이플라워 항해일지는 아닙니다. 브래드포드는 플리머스 정착 후 약 10년이 지난 1630년 무렵부터 자신의 경험과 기존 기록을 바탕으로 식민지 역사를 회고해서 정리했습니다. 따라서 1차 사료이면서 회고적 역사서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메사추세츠 주 정부
Q2. 플리머스 이주민의 절반이 첫겨울에 사망했다는 것은 사실인가요?
대체로 사실입니다. 브래드포드는 100명이 조금 넘던 사람들 가운데 첫겨울 이후 50명도 채 남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특히 1621년 1~2월에는 질병이 심해 하루 두세 명이 사망하는 날도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Project Gutenberg
Q3. 스콴토가 없었다면 플리머스 식민지는 실패했을까요?
역사적으로 ‘반드시 실패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스콴토가 옥수수 재배, 어로 장소, 지역 이동, 통역과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브래드포드의 기록에서도 확인됩니다. 플리머스 생존에서 그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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